퍼시픽림 존나 재미있지 않았니

퍼시픽 림을 봤다. 물론 엊그제 봤단 얘기는 아니고, 한창 관람하고 있을 때 봤다는 거다. 3디로 두번 4디로 한번. 사실 기대한 것과는 별개로 그렇게 흥행에 성공하진 못했다. 개인적으로는 참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지만, 생각해보면 그럴만한 것도 있다. 어쩌겠는가, 내 취향이 완전한 비주류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주류에 가까운 것도 아닌것을. 어쨌거나 몇가지 주제에 맞춰 얘기를 좀 해보자.


1. 이것은 왜 길예르모 델 토로가 아니란 말인가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뭐가 있을까. 아무래도 그만의 어둡고 기괴한 DEEP DARK FANTASY(다른걸 떠올리면 곤란하다)가 아닐까. 솔직히 내가 그의 영화 전부를 본 건 아니고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판의 미로>, <헬보이>, <블레이드2>를 본 정도인데, 이번에 퍼시픽 림을 보고 나온 수많은 길예르모 델 토로의 팬들이 전혀 그가 만든 영화답지 않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조금 놀랐다. DEEP DARK FANTASY라는 관점에서 벗어나면 퍼시픽 림이야말로 굉장히 길예르모 감독다운 영화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묘한 판타지를 벗어나면 뭐가 있냐고? 바로 강인함에 대한 경외다.


내가 길예르모 델 토로를 인식한 첫번째 영화는 바로 블레이드 2다. 웨슬리 스나입스가 나와서 정말 간지난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액션으로 뱀파이어를 차고 쏘고 써는 이 영화, 그야말로 멋의 향연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이 영화에서 내가 가장 감동한 장면은 뱀파이어를 써는 장면이 아니다. 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슴 속 깊이 박혀있는 장면은 바로 레인하트를 썰고나서 휘슬러에게 선글라스를 받는 장면이다.


3분 남짓이니 끝까지 보길 추천한다


반동 하나 없이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이 손에 쓱 잡히는 선글라스의 저 장면! 블레이드의 강인함을 상징하는 듯한 저 장면이야말로 최고의 장면으로 가슴 속에 박혔다. 그리고 이런 경외적인 강인함이 드러나는 장면은 어떤 작품에서는 액션(블레이드, 헬보이)으로, 공포(판의 미로)로 나타난다. 어쩌면 저 '경외'가 DEEP DARK FANTASY의 시발점인지도 모르겠다.


고야의 거인. 이게 모티브가 되었다고도 한다.


그리고 이 경외적인 강인함은 퍼시픽 림에 이르러 폭발한다. 80미터가 넘는 로봇과 괴수의 격돌에는 호방하고 통쾌한 액션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할 수 없는 힘의 격돌에서 품게 되는 경외감 역시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어두운 밤과 바다 등을 배경으로 괴물의 습격을 막아야 하는 퍼시픽 림의 액션 장면에는 그런 경외감이 훌륭하게 녹아들고 있다. 


(그러고보니 길예르모 감독 특유의 판타지적인 디자인이 반영된 부분도 하나 있긴 하다. 스트라이커 유레카의 성능을 보여주기 위해서 잠깐 등장해 호주 방벽을 뚫은 카이쥬 뮤테보르는 좀 그런 느낌이 있더라. 순간 카메오 출연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음.)



2. 좋은 시나리오란 무엇인가

퍼시픽 림을 보고 나온 관객들의 평가에서 빠지지 않는 얘기가 있다. 시나리오가 별로였다, 시나리오가 유치했다 뭐 이런 이야기들. 너무 뻔해서 이야기 전개가 어떻게 될지 예상이 가능하더란 이야기. 그래서 결국 이 영화는 별로야! 쓰레기야! 허접이야!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물론 퍼시픽 림의 시나리오 구조는 단순하다. 나쁘게 말하면 뻔하다. 하지만 그게 과연 퍼시픽 림 시나리오의 단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비비 꼬인 시나리오와 블록버스터의 결합, 다크나이트, 인셉션


생각해보면 어느 시점에서부터 반전 시나리오라는 것이 유행을 하기 시작했다. 범인은 마지막까지 알 수 없고, 출생에는 비밀이 있으며, 사실은 브루스 윌리스가 유령이라는 바로 그 반전 영화들. 이리저리 비비 꼬인 시나리오로 관객이 치열하게 머리를 쓰게 만드는 바로 그 영화들. 그런데 이런 반전 시나리오와 블록버스터 영화가 합쳐지면서 사람들은 블록버스터 영화에도 이리저리 꼬여있는 시나리오를 바라게 되었다. 물론 이건 다 크리스토퍼 놀란 때문이다(뻥).



뭐든 잠시 좀 꺼둘때도 필요한 법이다.


예전에 이런 광고가 유행한적이 있다. 한석규 성님과 스님 한분이 대나무 숲을 걷는데 갑자기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린다. 한석규가 멋쩍은 웃음을 띄우며 휴대전화 전원을 끈다. 그리고 뜨는 광고 카피 "또 다른 세상을 만날 때는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


그렇다. 뭐든 잠시 꺼두는게 좋을 때가 있다. 생각해봐라, 눈앞에 나이아가라 폭포의 장관이 펼쳐지는데 당신은 낙수의 속도와 그것이 떨어지는 낙하지점에 따라 달라지는 지형의 변화에 대한 생각을 할 것인가? 퍼시픽 림의 화면은 나이아가라 폭포와도 같은 장관을 자랑한다. 그 앞에서는 뇌가 지껄이는 소리를 꺼놓는 편이 관람하기에 좋은데, 이를 위해 시나리오는 최대한 단순한 편이 좋다. 예거의 각 관절 작동 방법도 모르는 상황(물론 그 작동 방법은 길예르모도 모르겠지)에서 EMP가 유효하니 마니 하는 생각은 집어치우는 편이 속 편하다 이 말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사람들은 그런 시나리오의 여백을 가만두질 못하게 되어버렸다. 우리는 단순하고 강력한 동기를 지닌 적을 마주한 것이 너무 오래되었다. 요 몇 년 동안 우리의 적은 너무나도 복잡했고, 너무나도 영악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게 다 크리스토퍼 놀란 때문이다(뻥).



3. 그리고 남은 이야기 몇 개

- 예거와 카이쥬의 대결 장면을 보면 한번씩 살짝 빠르게 줌을 땡기면서 얼굴 부분을 클로즈 업을 때릴 때가 있다. 그런데 거기서 진짜 에스프레소 트리플 샷만큼이나 진한 특촬물의 향기가 나더라. 살짝 흔들리는 듯하면서 예거나 카이쥬의 얼굴을 당기는데 그 정도나 속도가 딱 울트라맨이나 파워레인저의 그것이었다. 뭐라 설명은 못하겠는데 여튼 그것은 그것이었다. 직접 편집해서 비교해볼수도 없고...ㅠㅠ 확실히 이런 쪽의 정서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종합선물세트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와중에 또 가서 보고싶어진다...


- 모리 마코에 대한 불만이 많던데, 사실 배우 키쿠치 린코는 연기를 잘한 편에 가깝다. 설정상 그녀의 나이는 23살인데, 조금 노안인 23살 아가씨를 생각하고 보면 딱이다. 다만 머리스타일이나 메이크업, 배우의 나이(...) 등이 23살에 어울리지 않았을 뿐. 다른 배우를 쓰거나 처음에 나이에 대한 언급이 있었으면 좋지 않았을까...참고로 영화 개봉 초기에 배두나 얘기가 있었는데, 사실 한국 배우중에서는 차라리 이나영이 더 어울릴 것 같더라.


- 집시 데인저와 오타치의 대결 장면에서 기억에 남는 게 두가지 있다. 하나는 집시 데인저가 뻗은 주먹이 건물을 뚫고 들어가 책상위의 진자를 움직이게 하는 장면인데, 뭐랄까 사실 조금 불필요해보이는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감탄한 장면이다. 왠지 모를 여유와 장난기가 느껴졌달까. 그래서 극장에서 혼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집중해서 영화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길예르모 감독이 끼어들어서 "야 어때, 존나 재밌지?" 하고 말해주는 그런 느낌.


- 그리고 또 하나는 내가 1회차 관람에서 눈물을 흘린(한방울dlwlaks)인데, 바로 오타치가 집시 데인저를 움켜쥐고 날개를 펼치는 장면이었다! 거의 블레이드2의 선글라스 장면만큼이나 강력한 인상을 남긴 장면인데, 블레이드 때는 눈물을 흘리지는 못했다. 아마 극장에서 보질 못해서 그런 것 같다. 개봉 당시에는 고등학생이어서.... 어쨌거나 오타치가 날개를 펼치는 장면은 정말 굉장히 굉장한데, 솔직히 브루스 윌리스가 유령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보다 충격적이었다. 그 때 처음 카이쥬가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 장관이지 않은가, 그 거대한 날개라니, 태고의 씨발 거대한 신비가 막 살아숨쉬는 것 같지 않은가! 지금도 생각만 하면 설렌다. 역시 퍼시픽 림의 주인공은 카이쥬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보는 역지사지 만화 '카이쥬 림'


PS: 사실 퍼시픽 림은 단순한 시나리오 구조에 비해 할 얘기가 굉장히 많은 영화다. 의외로 매력적인 캐릭터(뉴튼, 스태커, 모리 등)가 산재해있고, 카이쥬와 예거 역시 영화 전면에 드러나지 않은 수많은 이야기가 많기 때문. 그야말로 덕질하기 좋은 영화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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